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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호] 농사_산골아낙과 딸내미ㅣ청년농부 전동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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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작성일18-04-17 14:01 조회24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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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봄 통권39호ㅣ농사

산골아낙과 딸내미

청년농부 전동선

글/사진_전동선

​                                                                                                                                                                              

 

 

​안녕하세요? 저는 올해 23살이 된 청년농부 전동선입니다. 저는 14살의 나이에 진안군 성수면으로 이사를 와 면소재지의 중학교를 졸업했고 행복한 삶을 응원하는 부모님의 지지 덕분에 푸른꿈고등학교(무주에 있는 대안학교. 편집자 주)에 진학하였습니다. 1주일에 하루는 온전히 농사를 짓는 그 곳에서 사람과 자연, 생명의 소중함을 배웠습니다. 땅을 일구고 작물을 심고, 물을 주고 키워 수확하는 일련의 과정은 늘 새로웠고 즐거웠습니다. 키운 작물을 거두어 학교 급식시간에 친구들과 함께 나누어 먹는 즐거움이 컸습니다. 그렇게 저는 3년 동안 작은 농부의 삶을 체험했고 ‘행복한 농부로 살겠다.’고 마음먹게 되었습니다.


 


2017년, 한국농수산대학을 졸업한 저는 바로 농사에 뛰어들었습니다. 땅도, 돈도 이렇다 할 경험도 없이 맨몸으로 농사를 시작하겠다니 주변의 많은 분들이 우려의 눈으로 바라보았습니다. ‘괜찮겠어?’, ‘우선 기술센터든 농촌진흥청이든 일을 좀 하다가 시작하는 게 어때?’, ‘그래도 자재 값은 있어야 하잖아.’ 그래서 저는 농사를 시작하기 전 두달 동안(1월과 2월) 진안의 홍삼 가공공장에서 알바를 했습니다. 그리고 2017년 3월, 땅을 빌려 농사를 짓기 시작했죠.


1500평. 처음 시작하기에는 벅찬 평수였습니다. 하지만 어머니와 함께 하기에 두렵지 않았죠. 우선 1500평 땅을 빌린 후 경영체 등록을 했습니다. 어머니와 함께 일을 하였지만 어머니는 어머니의 농사를, 저는 저의 농사를 짓는 각각의 독립적인 농부가 되길 원했거든요. 저희는 그렇게 ‘따로 또 같이’의 삶을 시작했습니다. “산골아낙과 딸내미”라는 이름으로요. 

3월, 저의 농사를 지지해주는 마을 어른이 땅을 갈아주셨습니다. 문제는 고랑을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고랑을 만들기 위해 관리기 부탁을 드려야 하는데 밭 장만이 한창인 시기라 부탁드리기 어려웠습니다. 더구나 저는 그 마을 사람이 아니었으니까요. 그래서 젊고 튼튼한 몸을 활용해서 괭이를 손에 들고 고랑 만들기를 시작하였습니다. 어머니와 함께, 젊은 여자 둘이서요. 한 고랑 한 고랑 만들면서 사실 너무 재밌었습니다. 힘들지 않다면 거짓말이지만 한 고랑 한 고랑 완성했을 때의 기쁨이 너무 커서 힘든 것은 금방 잊혔습니다. 

사실 제가 농사를 짓는다고 했을 때, 마을 어른들은 ‘저 젊은 애가 농사를 짓겠다고?’, ‘못견디고 금방 나갈것이여’, ‘아니 기술센터나 면사무소 시험을 봐서 직장을 다니지 왜 농사를 짓는다냐’며 못미더워 하셨습니다. 하지만 웃고 즐기며 하루 다섯 고랑씩 밭의 모양새를 만들어 나가는 저와 어머니를 보고 점점 궁금해하셨죠. 반 이상의 고랑이 완성되었을 때, 마을 어르신들이 저희 밭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습니다. ‘뭐가 그렇게 재밌어?’, ‘밭에는 뭘 심을거야?’, ‘괭이질하면 안 힘들어?’. 그리고 ‘젊은 학생이 정말 열심히 하네. 농사짓고 살겄네 살겄어!’. 정말 기뻤습니다. 뭐랄까 저의 미래를 보장받는 기분이랄까요?  

열심히 만든 고랑에 비닐을 씌우고 때를 따라 씨를 뿌렸습니다. 우엉, 초석잠, 수세미, 여주, 아피오스(인디언감자) 그리고 강낭콩까지. 하고 싶은 작물이 많아 고르고 고른 작물들이었죠. 씨를 뿌리고 물을 주고 풀이 나지 않도록 부직포를 씌우자 그럴듯해 보였습니다. 완성된 밭을 보고는 너무 신이나 폴짝폴짝 뛰었더랬죠. 마지막으로 덩굴식물들이 타고 올라갈 지주대를 세우고 유인망을 설치하자 제 밭의 일이 끝났습니다. 그리고 어머니의 밭으로 일자리를 옮겨 어머니의 밭까지 끝내고 나니 5월이 되었습니다. 

 

 

 

밭의 작물들은 다들 싹을 틔우고 열심히 자라기 시작했고 날이 다르게 자라났죠. 밭이 점점 푸르러지며 풀들도 자라기 시작했습니다. 비닐을 씌우고 부직포까지 덮었지만 그래도 풀은 자라더라고요. 호미를 들고 풀을 뽑기 시작했습니다. 차근차근 한 고랑씩 해나갔죠. 그렇게 마지막 고랑의 풀을 다 정리하면 다시 첫 번째 고랑에 풀이 자라있어서 다시 호미를 들고 앉아야 했습니다. 끊임없이 풀 뽑기를 해야하는 반복작업이었습니다.
반복되는 하루하루였지만 지루하거나 지겹지는 않았습니다. 틈틈이 돗자리를 깔고 밭 가양에 있는 매화나무에서 꽃을 따 꽃차를 만들어먹으며 어머니와 도란도란 얘기를 하고 쉬는 시간을 가졌거든요. 그 10분 20분의 쉬어감이 즐거웠고 매일 다른 풍경을 보여주는 산과 들은 항상 새로웠으니까요. ‘농사짓길 너무 잘했다. 너무 행복해’ 쉬는 시간, 어머니와 수다를 떨 때면 들던 생각이었습니다.  

그렇게 5월, 6월, 작물의 꽃이 피고 열매를 맺으며 수확이 시작되었습니다. 어머니 밭의 옥수수는 멧돼지가 내려와 회포를 푸는 바람에 자연으로 돌아갔고 제 밭의 강낭콩을 따기 시작했죠. 하지만 문제는 장마였습니다. 장마를 생각하지 못하고 강낭콩을 잔뜩 심은 바람에 콩이 썩기 시작했죠. 강낭콩은 물에 닿으면 썩는다는 기본도 모르고 잔뜩 심었으니. 조금이라도 살려야 한다며 부랴부랴 콩을 수확했습니다. 뿌리째 뽑아 하우스 안으로 옮기고 말렸습니다. 강낭콩을 거둬 들이고 나니 들꺠를 심을 시기가 되었습니다. 쉴 틈도 없이 들깨를 심었습니다.  

들깨를 심고 나니 수세미와 여주가 수확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배추 모종도 옮겨 심어야했고요. 농사일은 이렇게 끊임없이 이어지며 ‘한가할 때’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죠. 철을 못 맞춰 상하고, 짐승이 덤벼 상하고. 상하는 것들이 많았지만 ‘이만하면 다행이다’, ‘남은 것이 더 많다.’ 하며 저를 다독였습니다. 당장에는 속이 상했지만 어머니는 첫해 농사에 이만하면 대박이라며 박수를 쳐주셨어요. 그런줄 알고 한 해 농사에 감사했습니다. 

봄이 성큼 다가왔습니다. 날씨가 일을 시작하라며 저를 재촉합니다. 작년의 밭을 정리하며 올해 심을 작물을 기대하는, 저는 행복한 청년, 행복한 농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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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과 마을, 마을과 지역, 지역과 사람을 잇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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